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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모든것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감독의 영화 쌍화점 스토리 와 나만의 생각

by ㉢㎬”『㎯ 2023. 3. 7.

너무나 잘생기고 이쁜 남녀가 뽀뽀를 하고 있다
쌍화점

 

쌍화점의 발화점이 되는 스토리라인

 

한 남자가 다른 한 남자를 사랑했다. 한 남자는 고려의 왕이었고 다른 한 남자는 호위무사였다. 호위무사 또한 왕을 사랑했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런데 왕에게는 왕비가 있었다. 그녀는 호위무사를 증오했다. 그러던 중 후사 문제가 불거지자 왕은 자신은 여자를 품을 수 없는 몸이라며 왕비를 호위무사와 합궁토록 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의 아이이길 바랐으니까. 왕비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여자를 한 번도 품어보지 못했던 호위무사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자신도 몰랐던 욕정의 봉인은 풀려버렸고 흘려야 할 것은 넘쳐났으니까. 결국 호위무사는 왕비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자 왕비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은 그렇게 욕정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왕은 그것을 눈치챈다.

이것이 쌍화점의 발화점이 되는 스토리라인이다. 아이러니가 살아 있고 강력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런 몇 줄의 이야기를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의 유하 감독이 만든다고 한다면 도통 보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그만큼 감정의 서사를 잘 끌고 가는 감독이 없다고 여겼으며 주제 의식 또한 확실하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확실히 실패한 듯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라고 여겼던 감정의 서사 면에서 그렇다. 쌍화점이 아주 농도 짙은 멜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전부 실패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의 감정이입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기본 세팅을 다시 한번 깊이 곱씹어보면 매우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어려움이 관객의 감정이입에 고스란히 전해졌다고 믿는다.

누가 제일 불쌍하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왕이다. 왕은 100% 신뢰하는 아니 아마도 신뢰의 개념 따위는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었던 자신의 정인을 다른 사람과 동침하게 했다. 그랬더니 '잘못된 만남'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것조차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사랑했기에 실수로 용인하려 하였다. 정인 스스로 실수라고 말했다. 한 순간의 욕정이라고 말했다. 신뢰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지만 왕은 믿고 싶었다. 극한까지 고뇌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깨어진다. 그는 엄청난 상처를 받고 분노를 폭발시킨다.

 

관객이 충분히 그의 편이 되고도 남는 설정. 스토리의 재미와 감동은 관객이 얼마나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을 하느냐에 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은 '연민'이다. 연애에는 권력이 존재하는 법인데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왕은 주인공으로써 훌륭하다. 그런데 한 발짝 물러나 3인칭의 시점에서 보면 '왕'이기에 그는 적절치 않다. 그의 계급은 약자의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애절한 멜로는 자칫 약자의 멜로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위험이 있다. 거기에 하나가 더 보태진다. 바로 그의 사랑이 동성애라는 것이다. 그의 사랑이 아무리 진실한다 한들 관객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고 결국 관객은 어디에 감정을 이입해야 할지 다소 혼란을 일으키다가 호위무사와 왕비의 멜로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후의 전개를 보면 사실상 감독 스스로 손을 들어줘버렸다. 어느새 쌍화점의 이야기는 왕의 애절한 멜로가 아닌 호위무사와 왕비의 애절한 멜로, 금지된 사랑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하면 이야기는 좀 더 대중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과 왕의 폭압. 그런데 문제는 왕의 애절한 멜로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면서 발생한다. 놓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양 쪽의 멜로가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다면 쌍화점은 셰익스피어 비극을 넘어서는 마스터피스로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설펐다. 그렇다 보니 관객들은 어디에 가슴을 내어줘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되고 결국 영화의 엔딩에서 그들의 슬픔이 절절히 와닿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를 떠올려보자. 왕은 누구를 연상케 하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음에도 우유부단하게 일을 질질 끌다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되는 그. 햄릿이다. 금지된 사랑을 하는 호위무사와 왕비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햄릿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들어가는 것과 달리 겉보기에 충분히 비극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이 5대 비극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어쨌든 두 작품의 성향이 다르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자는 확실한 비극이고 후자는 안타까운 로맨스에 가깝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의 플롯을 한 작품 안에 녹이는 것이 어려움은 당연하다. 영화의 엔딩을 보고 나니 감독은 비극 쪽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왕과 호위무사가 결투를 벌이는 장면은 햄릿의 그것과 유사한 분위기지만 감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중반부는 호위무사와 왕비의 금지된 사랑에 더욱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를 떠올려보면 이 영화는 철저히 수미상관법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왕의 감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그러면 뭐 하나. 중간 덩어리는 완전히 다르다.

 

나만의 생각

 

이래서 주인공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쌍화점은 무사가 아닌 왕을 확실한 주인공으로 선택했어야 한다. 나는 영화 중반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 영화가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왕만 보려 했다. 호위무사와 왕비가 등장할 때조차 그가 느낄 배신감, 안타까움, 슬픔 등의 감정을 계속 상상했다. 왕의 분량이 너무 적은 것 같아 불만이었다. (더불어 왕과 무사의 베드신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겨우 왕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말이다. 관객들은 왕이 "너는 날 단 한 번도 정인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더냐"라고 무사에게 물었을 때 다소 낯간지럽거나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은 스토리를 통해 그냥 느끼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감독은 왕의 감정이 관객들에게 읽히지 않을까 봐 걱정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왕비가 부총관에게 그 역시 살해될 위험이 있음을 충고하고 회유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나마 비극으로써 완성도를 갖추려면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을 그대로 놔둔 채 무사를 주인공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왕비는 부총관에게 왕을 죽이라고 명한다.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궁으로 들어온 무사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들과 계략을 짜 왕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이 오해했음을 알게 되고 왕의 깊은 사랑과 자신 또한 왕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왕을 구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왕은 자신이 세운 계략에 죽고 말고 자신 또한 부총관의 계략에 죽고 만다.

 

두 마리 토끼 모두를 놓친 감독

 

쌍화점의 후반부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무사의 깨달음이 너무 뒤늦게 배치되어 그것이 애절함을 유발하기보다 허무함에 가깝게 느껴진다. 어쩌면 위에서 언급했던 문제들로 인해 어떻게 해도 해결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쌍화점. 2008년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대작은 그렇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이 굉장히 볼만하다고 생각하며 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 정도로 감정 하나만으로 밀어붙인 작품은 보기 힘들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정사 장면은 다른 목적 없이 감정을 위해 연출되었기에 색, 계에서 만큼이나 진하고 숨 막히도록 애절하며 군더더기가 없게 느껴진다. 게다가 좋게 생각해 보자면 이 영화 웹 2.0 시대에 걸맞은 쌍방향 영화다. 감독은 선택하지 못한 채 두 마리 토끼 모두를 놓쳤지만 관객은 선택할 수 있다. 왕의 멜로 혹은 무사와 왕비의 멜로. 보이는 장면 너머의 자신이 택한 주인공의 감정만을 쫓는다면 꽤 묵직한 울림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금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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