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의 모든것

영화 중경의 배경과 규칙 그리고 아쉬운점

by ㉢㎬”『㎯ 2023. 3. 7.

고개를 푹 숙인 채 식탁에서 딸과 함께 밥을 머고 있는 모습
중경

 

소통이라는 개념의 시작 단계

 

몇 년 전이었나요? 인터넷에서 인간의 우울 증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성향의 글을 하나 본 적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뭔가 남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힘내세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당사자에게는 상처가 된다는 유의 내용이었죠. 몸에 기운이 다 빠져 있는데 힘내시라는 말로 그게 채워질 일이냐고, 우울한 증세 같은 건 결코 몇 마디 말로 채워지지 않으며 조언자의 위치에 서 있다면 그런 몇 마디 성의 없는 말보다 더 발전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글을 처음 봤을 때는 그 내용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분이 그런 말을 한 의도를 어느 정도는 알 것도 같습니다. 어떤 증상에 대해서 본인이 다 아는 것처럼 어떤 말을 툭 던지고 마는 것은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악독한 행위 중 하나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생산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저는 그건 인간들이 가지는 의지와 교류 문제라고 봅니다. 결국은 인간관계와 얽힌 이야기라는 거지요. 어떤 현상에 대해서 잘 알고 수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게 소통이라는 개념의 시작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 중경의 배경과 규칙

 

위에서 구구절절 이야기했던 상황을 복기하여 생각해 보면 장률 감독의 신작 중경은 한 마디로 가차 없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순간 관객들은 한 사람의 방관자가 됩니다. 스크린 안에서는 끊임없이 이미지들이 쏟아지는데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정작 스크린을 향해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죠. 아니, 이 영화는 애초부터 관객들의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습니다. 순전히 그 모습을 보여 주는 데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지요. 그것이 스크린이라는 영사 장치를 통해 비치는 모습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것이 변명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을 받건 말건 세상은 영화 말미에 사람들이 떼 지어 지나가면서 흐르는 인터내셔널가처럼 자기 흐름대로 알아서 흘러가고, 관객들은 그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경은 마치 관객들에게 인내심 테스트를 하려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보다 보면 좀 고통스럽기까지 하지요.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돼요. 이쯤 생각이 미치면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중경이라는 도시가 남의 나라 도시 얘기가 아닌 것도 같습니다.

 

중경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중경이라는 도시는 상당히 미묘한 공간입니다. 더불어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무거운 느낌의 도시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 무게를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인공 쑤이(궈커이 분)가 있어요. 그녀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북경어 강습을 하는 교사입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데 아버지는 도통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성을 향해 어떤 감정을 품기도 하지만 그 감정은 하나같이 (쑤이 본인의 생각과 연결된) 어떤 배신적 행위에 의해 짓밟힙니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구질구질한 모습들에 그녀는 아주 서서히 삶의 방향성을 잃어 가기 직전 상황까지 갑니다. 도입부에서 학생들에게 차후 수업 과제를 내주면서 明天今更好 (내일은 더 좋아질 거예요)라는 다섯 글자 단어를 칠판에 적으며 어떤 희망적 메시지를 뿌려놓는 듯하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사람이 살고 싶은 대로 마냥 흘러가지 않는 법이고 이것은 그녀에게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칠판에 적은 글자는 그녀에게는 단순한 단어의 조합이자 희망고문에 불과할 뿐인 겁니다.

 

영화 중경은 철저히 그 배경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오는 환경에 카메라를 의탁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중경이라는 도시는 약간의 고요함을 품고 있는 도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락과 혁명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동네 공원에서는 젊은 여자들과 나이가 어느 정도 지긋한 남자들이 얼마 줄게, 함께할래? 와 같은 말을 일삼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집 강제 철거와 관련하여 반감을 가득 실은 여론이 들끓어대며, 헐벗은 경관 한 명이 허망하게 도시를 가로지르며 걸어 다니죠. 이런 도시의 모습들은 순전히 그 배경이 되는 중경이라는 도시에서 나오고, 그 도시를 살아내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나오는 모습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엄연히 규칙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어떤 일이든 그것을 굳이 영화 안에서 폭발시키려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표면장력에 의해 제어당하는 냄비 속 가득 찬 물처럼 말이죠. 감독이 의도한 폭발 직전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갖춘 중경은 바로 이것으로 인해 완성된 모양새를 갖춥니다. 매춘여성을 상대한 혐의로 체포된 아버지와 관련하여 호출을 받은 쓰이는 의외로 호의를 베풀어 주는 경관 왕위를 만나죠. 쓰이는 그 호의에 감사를 표하며 그 대가로 자신의 몸을 의탁하게 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처가 있고, 정부 역시 여럿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서 절망하고 탄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호텔방을 찾아갔다가 왕위와 다른 여자가 정사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되지만 그녀는 옆방에 앉아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조용히 호텔방을 나와 버리죠. 이미 무너져 버린 쑤이의 심경을 담은 모습이 이미지로 실체화된 모양새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다 때려 부숴 버리고 싶겠지만 말이죠. 이쯤 되니까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것이죠. 중경은 그것에 대한 답을 굳이 관객들에게 던져 주는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은 관객들의 상상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중경의 다른 한 조각이자 11월 13일에 개봉하는 이리에서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보면서 이야기가 좀 더 납득하기 쉬웠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했어요. 무너지는 중경과 인간들의 이미지에 집중을 하다 보니 이야기의 구성은 약간 헐거운 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감독의 의도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보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구조를 좋아하게 마련이죠.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이미지의 모습이 꽤 좋기 때문에 이야기의 헐거움 정도는 상쇄하고도 남지만 그래도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통해 얻은 수확이 없는 건 아니죠. 인생이라는 굴레 속에 내몰린 인간들의 심리적 모습을 너무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95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끌고 나간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을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주어진 재료만으로도 자기 할 일은 분명 다 해 내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중경의 가치는 결코 하찮게 치부할 영역 바깥에 있습니다. 물론 이 코스를 제대로 접하기 위해서는 러닝타임 동안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낯선 느낌을 극복해야 합니다.

댓글